왜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었을까? 박종철에서 6·29 선언까지
| 대통령을 내 손으로, 1987년 6월 |
1987년 6월 대한민국 거리에서는 한 가지 요구가 반복해서 울려 퍼졌습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있게 헌법을 바꾸라는 요구였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집권세력은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6월 말이 되자 상황은 뒤집혔습니다. 6월 29일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직선제를 규정한 새 헌법이 확정되었습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던 것일까요? 답을 찾으려면 6월의 시위만 볼 것이 아니라 직선제 요구가 커진 배경,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조치, 시민 참여의 확대, 그리고 제도적 개헌 과정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핵심 한눈에 보기
- 1987년 이전에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간선제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사건 축소·은폐 사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크게 키웠습니다.
- 4·13 호헌조치는 개헌 요구를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호헌 철폐·직선제 개헌'이라는 분명한 요구를 결집시켰습니다.
- 6월 시위가 학생 중심을 넘어 회사원과 일반 시민 등으로 확산되면서 정치적 압력이 커졌습니다.
- 6·29 선언 뒤 국회 의결과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 직선제가 헌법에 명문화되었습니다.
직선제는 왜 1987년의 핵심 요구가 되었을까
6월 민주항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대통령 선출 방식부터 봐야 합니다. 제5공화국 헌법 아래에서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직접 표를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대통령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졌습니다. 단순히 선거 방식을 하나 바꾸자는 요구만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을 누가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국민의 정치 참여를 둘러싼 상징적인 쟁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1987년의 직선제 요구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된 개헌 논의가 한 지점에 모인 결과였습니다.
| 간선제 유지 → 직선제 개헌 요구 확대 → 4·13 호헌조치의 흐름 |
박종철 사건은 왜 정치적 불신을 폭발시켰을까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했습니다. 이후 수사 과정과 사건 처리에 대한 의혹이 이어졌고, 5월에는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파장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 사건이 중요했던 이유는 한 학생의 죽음을 넘어 국가기관이 행사한 폭력과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으려 했다는 문제가 동시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진상 규명 요구는 정치제도 개혁 요구와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 중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기존 헌법에 따라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취지의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정치적 혼란을 정리하고 기존 일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선택이었지만,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던 세력은 이를 개헌 요구를 차단하는 조치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박종철 사건으로 높아진 불신과 호헌조치에 대한 반발이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졌습니다.
6월 10일, 왜 시위는 쉽게 끝나지 않았을까
1987년 5월 27일 여러 민주화운동 세력이 참여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습니다. 이 단체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습니다. 이 사건은 이미 쌓여 있던 사회적 긴장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6월 10일 집회는 서울 한 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연표에는 이날 집회가 전국 20개 도시에서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명동성당 농성 등이 이어졌고 회사원과 상인, 일반 시민의 참여도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중요한 변화는 시위의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부가 시위를 일부 학생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행동으로만 규정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는 점입니다. 거리의 요구도 '호헌 반대'에서 멈추지 않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구체적인 제도 변화로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 박종철 사건·4·13 호헌조치·이한열 피격이 시민 참여 확대로 이어진 인과관계 |
6월 26일, 정부가 기존 입장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다
6월 내내 시위가 계속되면서 항쟁의 지역적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특히 6월 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은 중요한 분수령이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연표는 이날 전국 33개 도시에서 약 10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며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참가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항쟁이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확대됐다는 점은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됩니다.
이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 일정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선택에는 점점 더 큰 정치적·사회적 부담이 따르게 됐습니다. 반대로 시위를 무력으로 강하게 진압하는 선택 역시 더 큰 충돌과 반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결국 집권세력도 기존 입장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사건이 갑자기 정부의 선택을 바꾼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직선제 요구의 누적, 정부에 대한 신뢰 약화, 전국적인 시민 참여와 계속되는 시위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6·29 선언, 직선제 요구가 제도 정치로 들어오다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대표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여야 합의를 통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정치 관련 구속자 문제, 기본권과 언론 자유 확대 등의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다음 날 노태우 대표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를 건의했고, 7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은 수용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로써 거리에서 요구되던 직선제 개헌은 여야가 실제 헌법 개정을 논의하는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6·29 선언을 집권세력의 자발적인 정치개혁으로 강조하는 시각과 대규모 시민항쟁의 압력에 따른 양보에 더 무게를 두는 시각은 표현과 해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시간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직선제 요구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뒤 집권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고, 이후 실제 헌법 개정 절차가 진행됐습니다.
1987년의 변화는 어떻게 헌법이 되었을까
6·29 선언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곧바로 법적 제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선언 이후 여야가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고, 1987년 10월 12일 국회에서 개헌안이 의결됐습니다.
이어 10월 27일 제6회 국민투표가 실시됐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 2,561만 9,648명 가운데 78.2%가 투표에 참여했고, 투표자 가운데 93.1%가 개헌안에 찬성했습니다.
개정 헌법은 10월 29일 공포됐습니다. 새 헌법 제67조 제1항은 대통령을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로 선출하도록 규정했습니다. 6월 거리에서 외쳤던 '직선제'가 헌법의 문장이 된 것입니다.
| 날짜 | 주요 사건 | 의미 |
|---|---|---|
| 1987.1.14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국가기관의 인권침해와 사건 처리에 대한 불신 확대 |
| 1987.4.13 | 4·13 호헌조치 | 개헌 요구와 정부 입장의 충돌이 분명해짐 |
| 1987.6.9 | 이한열 최루탄 피격 | 6월 항쟁 확산의 주요 계기 |
| 1987.6.10 | 6·10 국민대회 | 직선제와 호헌 철폐 요구가 전국적으로 확대 |
| 1987.6.26 | 국민평화대행진 | 전국적인 시민 참여와 정치적 압력 확대 |
| 1987.6.29 | 6·29 선언 | 집권세력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 |
| 1987.10.27 | 헌법개정 국민투표 | 직선제 개헌안 확정 |
| 1987.10.29 | 개정 헌법 공포 | 대통령 직선제가 헌법에 명문화 |
| 1987년 1월 박종철 사건부터 10월 직선제 개헌까지 핵심 연표 |
그렇다면 왜 6월 민주항쟁이 직선제를 이끌었다고 할까
핵심은 시민의 요구가 정치권의 선택지를 바꾸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4·13 호헌조치 직후에는 기존 헌법에 따라 다음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정치 일정이 제시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6월의 전국적인 항쟁 이후 그 일정은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거리의 시위만으로 헌법이 자동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시민의 압력이 정치적 협상의 조건을 바꾸었고, 6·29 선언을 거쳐 여야가 개헌안을 마련했으며, 마지막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됐습니다.
즉 6월 민주항쟁 → 직선제 수용 → 여야 개헌 협상 → 국회 의결 → 국민투표 → 헌법 개정이라는 여러 단계가 연결된 것입니다.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가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1987년의 변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지만 이후에도 정치개혁, 지방자치, 노동권, 인권과 과거사 문제 등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계속됐습니다.
따라서 6월 민주항쟁의 의미를 '한 번의 시위로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설명하기보다,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권력의 선출 방식을 변화시킨 중요한 제도적 전환점으로 이해하는 편이 역사적 흐름을 더 잘 보여줍니다.
3·1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함께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도 보입니다. 정치와 사회의 큰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기보다 이전의 경험과 요구가 축적된 끝에 새로운 선택을 만들어내곤 했다는 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6월 민주항쟁은 정확히 언제 일어났나요?
일반적으로 1987년 6월 10일 국민대회를 중요한 출발점으로 봅니다. 다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개헌운동 등 앞선 사건들이 직접적인 배경이었고, 이한열의 장례가 열린 7월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설명하기도 합니다.
6·29 선언과 대통령 직선제는 같은 것인가요?
같지는 않습니다. 6·29 선언은 집권세력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힌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국회의 헌법 개정안 의결과 국민투표를 거쳐 직선제가 실제 헌법에 반영됐습니다.
1987년 헌법에서 직선제는 어떻게 규정됐나요?
대한민국헌법 제67조 제1항은 대통령을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공포됐습니다.
직선제 하나 때문에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것인가요?
직선제는 가장 명확하고 상징적인 요구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 규명, 인권 보장, 언론 자유와 정치적 자유 확대 등 여러 민주화 요구가 함께 제기됐습니다.
마무리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한 사람의 결정이나 어느 하루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쌓여온 직선제 개헌 요구 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가 겹쳤고, 이한열 피격을 거치며 학생과 시민의 참여가 전국적으로 확대됐습니다. 그 결과 기존 정치 일정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고,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이 수용됐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는 국회의 개헌 절차와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 제67조에 새겨졌습니다. 1987년 6월의 가장 큰 변화는 거리에서 제기된 정치적 요구가 국가의 선거 제도를 실제로 바꾸는 힘으로 연결됐다는 데 있습니다.
참고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1987년 6월 항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4·13호헌조치 철폐투쟁」
- 국가기록원,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선언」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7.10.27. 제6회 국민투표」
-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헌법」
자료 확인일: 2026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