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렸을까? 전성기의 진짜 이유
| 해동성국 발해, 왜 강했을까 |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네 글자는 발해의 전성기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뜻을 그대로 풀면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 정도다. 그런데 발해는 무엇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흔히 선왕이 영토를 크게 넓혔기 때문이라고 기억하지만, 영토만 넓다고 번영한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발해가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무왕의 팽창, 문왕의 국가 체제 정비, 선왕 시기의 영역 확대, 5경과 교통망, 그리고 당·신라·일본·거란을 연결한 국제 교류가 함께 있었다.
핵심부터 정리하면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평가받은 이유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넓어진 영토를 실제로 통치할 행정 체제와 도시, 교통망을 갖추고 주변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정치·경제·문화가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해동성국’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해동성국의 ‘해동’은 중국에서 바라볼 때 바다의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성국’은 번성한 나라라는 뜻이다. 따라서 해동성국은 발해의 정식 국호나 왕이 스스로 사용한 칭호라기보다 발해의 번영을 나타내는 역사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표현이 후대의 교과서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 사료 DB에 수록된 『삼국유사』의 발해 관련 기록에는 『통전』을 인용하면서 발해가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어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다만 ‘해동성국’이 정확히 어느 한 왕의 재위 기간에 처음 붙은 별칭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현대 역사 서술에서는 주로 선왕을 전후한 9세기 발해의 전성기를 설명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즉 한 왕의 업적이라기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발해의 국력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말에 가깝다.
첫 번째 이유, 무왕이 발해의 활동 공간을 넓혔다
발해의 번영은 선왕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앞에는 무왕이 있었다. 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은 주변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발해의 영향력을 넓혀 갔다.
당시 발해 북쪽에는 흑수말갈이 있었고, 서쪽에는 거대한 당 제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흑수말갈이 발해를 거치지 않고 당과 직접 관계를 맺으려 하자 이는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북방 세력에 대한 발해의 영향력이 약해질 수 있는 문제였다.
무왕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결국 발해와 당의 관계도 크게 악화됐다. 732년에는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수군이 바다를 건너 당의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했다. 발해가 동북아시아의 작은 변방 국가에 머물지 않고 직접 군사 행동을 벌일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무왕의 방식만으로 국가가 계속 성장할 수는 없었다. 영토와 영향력을 넓혔다면 그다음에는 그것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제도가 필요했다. 이 역할을 맡은 왕이 문왕이었다.
| 무왕의 팽창 → 문왕의 체제 정비 → 선왕기의 전성기로 이어지는 발해 성장 흐름 |
두 번째 이유, 문왕은 넓어진 나라를 제도로 묶었다
문왕은 무왕과 다른 선택을 했다. 당과 계속 충돌하기보다 관계를 개선하고 당의 발달한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발해 내부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대표적인 것이 중앙 행정 조직이다. 발해는 당의 3성 6부제를 참고했지만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정당성·중대성·선조성의 3성을 두고, 정당성을 중심으로 6부를 운영하는 등 발해의 현실에 맞게 변형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강한 국가는 단순히 다른 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나라가 아니다. 필요한 제도를 선택해 자기 현실에 맞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발해는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자체적인 정치 질서를 발전시켰다.
문왕 시기에는 수도의 중요성도 커졌다. 발해가 가장 오랫동안 수도로 사용한 상경 용천부는 궁궐과 관청, 사찰, 주거 지역을 갖춘 대규모 도시로 발전했다. 도시 구조에는 당의 장안에서 영향을 받은 요소도 확인된다.
상경은 단순히 왕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었다. 전국의 행정과 교통이 모이고 외국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지는 발해의 정치·경제 중심지였다. 무왕이 국가의 외연을 넓혔다면, 문왕은 그 넓어진 공간 안에 국가를 작동시키는 골격을 세운 셈이다.
세 번째 이유, 선왕 시기에 영토와 통치 체제가 함께 확대됐다
문왕 이후 발해 왕실은 한동안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여러 왕이 짧은 기간 교체되면서 안정이 흔들렸지만, 818년 선왕이 즉위하면서 발해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선왕 시기 발해의 영향력은 동쪽으로 연해주, 서쪽으로 요동 지역, 북쪽으로 흑룡강 일대까지 확대됐다. 넓은 영역을 차지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주목할 것은 그 영역을 어떻게 관리했느냐이다.
발해의 지방 행정 체계는 일반적으로 5경 15부 62주로 설명된다. 상경 용천부를 중심으로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라는 다섯 거점이 있었다.
| 성장 단계 | 핵심 변화 | 해동성국으로 이어진 의미 |
|---|---|---|
| 무왕 | 주변 세력 복속과 대외 팽창 | 발해의 활동 영역과 군사적 영향력 확대 |
| 문왕 | 중앙 제도 정비와 상경 발전, 당과 교류 | 넓어진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기반 마련 |
| 선왕과 9세기 | 영토 확대와 지방 행정·교통망 발전 | 정치·경제·외교가 함께 성장한 전성기 형성 |
5경은 넓은 영토 곳곳에 배치된 중요한 거점이었다. 중앙에서 먼 지역까지 행정력을 전달하고 주변 국가로 이어지는 교통망을 관리하는 역할도 했다. 영토 확장과 행정 조직이 함께 움직였다는 점에서 발해의 전성기는 단순한 군사적 팽창과 구별된다.
| 발해 5경 15부 62주와 당·신라·일본·거란으로 이어진 5도 교통망 |
네 번째 이유, 발해 5도가 동북아시아를 연결했다
발해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도가 아니라 길을 봐야 한다. 넓은 영토가 있어도 사람과 물자가 움직이지 못하면 국가의 힘으로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당서』에는 발해에서 주변 지역으로 이어지는 다섯 교통로가 기록되어 있다. 동경 용원부 쪽에서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본도, 남쪽 신라로 향하는 신라도, 당으로 이어지는 조공도와 영주도, 거란으로 연결되는 거란도이다.
- 일본도: 동경 용원부에서 바다를 통해 일본으로 연결
- 신라도: 남해부와 동해안 지역을 통해 신라로 연결
- 조공도: 서경 압록부 방면에서 당으로 연결
- 영주도: 장령부를 거쳐 당의 영주 방면으로 연결
- 거란도: 부여부를 거쳐 거란 지역으로 연결
이 길을 따라 움직인 것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사신과 상인, 유학생과 승려, 각종 물자가 함께 오갔다. 길은 외교망이면서 무역망이었고 동시에 문화가 이동하는 통로였다.
특히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항상 적대 관계로만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 해설에 따르면 발해와 신라 사이에는 육로와 해로를 통한 왕래가 존재했다. 국가 간 경쟁과 교류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 이유, 교역이 발해의 경제를 키웠다
9세기 발해에서는 농업뿐 아니라 목축·수렵·수공업과 도시 상업이 발전했다. 수도 상경 용천부를 비롯한 주요 도시와 교통 요충지는 물자가 모이고 다시 퍼져 나가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발해는 당·신라·거란·일본 등 주변 여러 국가와 교역했다. 당으로는 육로와 해로가 모두 연결되어 있었고, 당의 산둥반도 덩저우에는 발해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발해관도 설치되어 있었다.
발해에서 외부로 나간 물품에는 모피와 인삼 같은 토산물, 말과 여러 수공업품 등이 있었고, 반대로 당에서는 비단이나 서적 같은 물품과 문화가 들어왔다. 일본과의 교류에서도 많은 인원이 오가는 사례가 확인된다.
결국 발해의 위치는 약점이면서 동시에 강점이었다. 당·한반도·일본·거란과 맞닿은 복잡한 국제 환경에 놓여 있었지만, 그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도 있었다. 발해는 그 지리적 조건을 상당 부분 국가 성장의 자산으로 바꾸었다.
| 행정 체제·도시·교통·국제무역이 연결되어 해동성국으로 성장한 인과관계 |
그렇다면 발해는 영토가 넓어서 해동성국이 된 것일까
절반만 맞는 설명이다. 영토 확대는 중요한 조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왕의 군사 활동을 통해 영향력이 확대됐고, 문왕은 당과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제도와 도시를 정비했다. 이후 선왕을 전후한 시기에 영토와 지방 통치 체계가 확대되고, 5경을 중심으로 여러 교통로가 연결되면서 발해는 주변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즉 발해의 힘은 군사력 → 통치력 → 교통망 → 교역 → 경제와 문화의 성장이라는 여러 요소가 맞물려 만들어진 결과였다.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복합적인 성장을 압축해 보여 준다.
사료에서는 ‘해동성국’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여기에서는 사실과 후대의 해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 사료 DB에 수록된 『삼국유사』에는 『통전』을 인용해 발해가 “해동성국”이 되었으며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이 후대 한국 역사교육에서 만들어진 표현은 아니라는 점은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이를 정확히 선왕 한 사람에게만 붙은 칭호라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 서술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 일반적인 역사교육에서는 선왕의 영토 확대와 전성기를 중심으로 해동성국을 설명하지만, 발해의 번영은 무왕과 문왕을 거쳐 9세기 여러 왕대에 축적된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해동성국은 왜 결국 멸망했을까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해서 그 힘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9세기 후반 이후 발해를 둘러싼 국제 질서는 다시 빠르게 변했다. 당의 힘이 약해지는 사이 북방에서는 거란이 성장했다.
발해 내부의 정치적 불안과 주변 세력의 변화가 겹친 가운데 거란은 발해를 공격했고, 결국 926년 발해는 멸망했다. 전성기의 넓은 영토와 국제 교류망도 주변 정세가 급변하고 내부 결속이 약해지면 오히려 지켜야 할 공간이 커지는 부담으로 바뀔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발해의 역사는 국가의 전성기를 보는 또 하나의 기준을 알려 준다. 나라의 힘은 영토의 크기만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그 공간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사람과 물자를 연결하며, 변화하는 국제 관계에 대응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결국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린 이유
발해의 전성기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왕은 국가의 외연을 넓혔고, 문왕은 넓어진 나라를 운영할 제도와 도시를 발전시켰다. 선왕을 전후한 시기에는 영역과 지방 통치 체제가 확대됐으며, 5경과 발해 5도를 통해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와 국제 교류가 함께 성장했기에 발해는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해동성국’이라는 말의 핵심은 ‘큰 나라’가 아니라 ‘번성한 나라’에 있다. 발해의 진짜 힘은 영토의 끝이 어디였느냐보다 그 넓은 공간을 하나의 국가로 연결할 수 있었다는 데 있었다.
자주 묻는 질문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른 사람은 누구인가요?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은 중국 측 기록과 이를 인용한 우리 사료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에는 『통전』을 인용하면서 발해가 해동성국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발해의 전성기는 선왕 때인가요?
일반적인 역사교육에서는 선왕 시기의 영토 확대와 지방 제도 정비를 발해 전성기의 중요한 계기로 설명한다. 다만 발해의 번영은 무왕과 문왕 시대부터 축적됐으며 9세기 여러 왕대에 걸쳐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좋다.
발해의 5경은 무엇인가요?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를 말한다. 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주변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망을 운영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발해와 신라는 계속 적대 관계였나요?
두 나라는 경쟁과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항상 전쟁만 한 것은 아니다. 발해와 신라를 연결하는 신라도가 존재했고 사람과 물자의 왕래도 이루어졌다. 동아시아의 국가 관계는 적대와 교류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 사료 DB, 『삼국유사』 「말갈과 발해 - 발해라 부르다」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발해의 성장 - 발해, 해동성국으로 우뚝서다」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발해의 교통로(5도)와 신라도」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발해의 경제 발달」
자료 확인일: 2026년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