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백년전쟁은 116년이나 이어졌을까? 왕위 영토 동맹이 만든 장기전
| 백년전쟁은 왜 116년이나 이어졌을까 |
전쟁에서 크게 이기면 상대가 항복하고 전쟁은 끝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중세의 영국과 프랑스는 달랐습니다.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이 크게 이기고,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프랑스 국왕까지 포로로 잡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뒤 아쟁쿠르에서 영국이 다시 대승을 거두었는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백년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16년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이름보다도 긴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두 나라가 11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전쟁을 벌였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 백년전쟁은 전쟁과 휴전, 재전쟁이 반복된 여러 분쟁의 연속에 가까웠습니다.
핵심부터 보면, 백년전쟁이 오랫동안 끝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미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영국 왕이 프랑스에 보유한 영토 문제, 봉건적 주종 관계, 프랑스 귀족들의 세력 다툼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은 멈췄다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백년전쟁은 정말 100년 동안 계속 싸운 전쟁이었을까
백년전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에서 오는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백년전쟁은 1337년에 시작돼 1453년까지 이어졌지만, 116년 동안 계속 전투가 벌어진 하나의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영국 왕립무기박물관은 백년전쟁을 하나의 장기전이라기보다 육지와 바다에서 벌어진 여러 공성전과 습격, 전투가 이어진 장기 분쟁으로 설명합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역시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1337년 이후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고 설명합니다.
중간중간 강화조약과 휴전도 있었습니다. 흑사병과 국내 정치 혼란 때문에 대규모 전투가 줄어든 시기도 있었습니다. 왕이 사망하거나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백년전쟁은 하나의 전쟁이라기보다 해결되지 않은 같은 문제를 놓고 여러 세대의 왕들이 반복해서 벌인 장기적인 전쟁이라고 보는 편이 실제 모습에 가깝습니다.
|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투와 조약, 휴전이 반복된 백년전쟁 흐름 |
갈등은 1337년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백년전쟁의 원인을 흔히 '영국 왕이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는 백년전쟁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이미 오랜 영토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세 영국 왕들은 잉글랜드만 통치했던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 안에도 상당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남서부의 아키텐과 가스코뉴 지역은 영국 왕실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문제는 영국 왕의 지위였습니다.
영국 왕은 잉글랜드에서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국왕이었지만, 프랑스에 가지고 있는 영지에 대해서는 프랑스 국왕과 봉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왕이 다른 나라에서는 또 다른 왕의 봉신이 되는 복잡한 구조였던 것입니다.
프랑스 왕권이 강해질수록 프랑스 왕은 국내에 남아 있는 영국 왕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 했습니다. 반대로 영국 왕은 오랫동안 보유해 온 프랑스 영지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갈등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남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1224년 프랑스 측 세력이 영국 왕이 지배하던 가스코뉴 지역을 공격했고, 보르도에서는 영국 국왕 헨리 3세에게 병력과 자금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올라왔습니다.
즉 백년전쟁이 시작되기 100년 이상 전부터 프랑스 안의 영국 영토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1328년 프랑스 왕이 후계자 없이 죽었다
여기에 왕위 계승 문제가 더해지면서 상황은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아들을 남기지 않고 사망했습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 이사벨라를 통해 프랑스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남계 혈통을 통해 왕실과 연결된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에드워드 3세가 곧바로 대규모 왕위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충돌은 1337년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서 지배하던 영토를 압박하면서 양국의 영토 분쟁이 본격적인 전쟁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리고 1340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라며 프랑스 왕위를 공식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영토를 둘러싼 갈등이었지만 이제는 프랑스의 국왕이 누구인가라는 문제까지 더해진 것입니다.
| 영국의 프랑스 영토 문제와 왕위 계승 문제가 결합해 백년전쟁으로 확대된 원인 구조 |
전쟁 초반에는 영국이 강했다
백년전쟁 초반에는 영국이 여러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대표적인 전투가 1346년 크레시 전투입니다.
영국군은 유리한 지형에 방어진을 만들고 프랑스군을 기다렸습니다. 특히 영국의 장궁병들은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강력한 위력을 보여줬습니다. 프랑스 기사들의 반복적인 돌격은 영국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영국군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중세 전쟁에서 국왕이 직접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왕권은 크게 흔들렸고 결국 양국은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 결과 영국은 프랑스에서 상당히 넓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국이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영국은 프랑스를 정복하지 못했을까
백년전쟁이 길어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거대한 영토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한두 차례 크게 격파한다고 해서 프랑스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에는 수많은 도시와 성, 지역 귀족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영국이 영토를 점령하려면 도시와 요새를 하나씩 장악해야 했고, 점령한 뒤에는 병력을 남겨 계속 지켜야 했습니다.
영국 본토에서 프랑스까지 바다를 건너 병력과 식량, 장비를 공급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큰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왕국 전체가 한 번에 무너지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병력을 모으고 잃었던 지역을 다시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영국은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할 수는 있었지만 프랑스 전체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브레티니 조약을 맺었는데 왜 또 싸웠을까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조약이 전쟁의 근본 원인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영토를 영국이 지배할 것인지 정하는 문제와 그 영토에 대한 최종적인 주권을 누구에게 인정할 것인지는 다른 문제였습니다.
영국 왕실의 프랑스 왕위 주장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프랑스는 국력을 회복하면서 영국이 차지한 지역을 다시 공격했습니다. 샤를 5세 시대에 프랑스는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영국의 점령지를 조금씩 되찾았습니다.
전쟁의 흐름은 다시 프랑스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 뒤 양국의 국내 사정과 정치 혼란이 겹치면서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415년 헨리 5세가 다시 프랑스로 건너왔다
전쟁이 시작된 지 약 80년이 지난 141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다시 프랑스 원정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당시 전장은 비 때문에 진흙탕이 된 상태였습니다. 중무장한 프랑스 병사들은 좁고 질척한 전장에서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웠고, 영국 장궁병과 방어진은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5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사적인 능력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내부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프랑스인끼리 싸우고 있었다
백년전쟁 후반부를 이해하려면 프랑스 내부의 정치 상황을 봐야 합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가 정상적으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가 반복되면서 왕실 내부의 권력투쟁도 심해졌습니다.
1419년에는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왕세자 샤를 측 인물들에게 살해되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뒤를 이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는 왕세자 샤를과 적대하게 되었고 영국의 헨리 5세와 손을 잡았습니다.
영국이 단순히 프랑스를 외부에서 공격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내부의 분열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1420년에는 영국이 정말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헨리 5세는 프랑스에서 세력을 빠르게 확대했고 마침내 1420년 트루아 조약이 체결됐습니다.
조약에 따라 헨리 5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고, 샤를 6세가 사망하면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반대로 프랑스 왕세자 샤를은 왕위 계승에서 배제됐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방향을 틀었습니다.
1422년 헨리 5세가 먼저 사망했습니다. 얼마 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도 사망했습니다.
영국 측에서는 헨리 5세의 어린 아들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왕세자 샤를 역시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 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진짜 국왕이 누구인가를 놓고 또 다른 단계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잔 다르크의 등장이 전쟁의 분위기를 바꿨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잔 다르크입니다.
1429년 당시 영국군은 프랑스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오를레앙이 함락된다면 왕세자 샤를의 세력은 큰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합류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 포위를 풀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프랑스군의 분위기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더 중요한 사건은 왕세자 샤를이 랭스로 이동해 1429년 7월 샤를 7세로 대관식을 치른 것이었습니다.
랭스는 오랫동안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르던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트루아 조약에서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됐던 샤를이 전통적인 대관식을 통해 자신이 프랑스의 정통 국왕이라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잔 다르크가 백년전쟁을 끝낸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잔 다르크의 활약이 백년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은 맞지만 잔 다르크가 직접 백년전쟁을 끝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잔 다르크는 1430년 부르고뉴 세력에 붙잡혔고 이후 영국 측에 넘겨졌습니다. 1431년 루앙에서 재판을 받은 뒤 화형당했습니다.
하지만 백년전쟁은 그 뒤에도 20년 이상 이어졌습니다.
잔 다르크가 남긴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리던 샤를 7세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프랑스가 다시 전쟁을 이어갈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 1420년 트루아 조약부터 1453년 프랑스 승리까지 전세가 역전된 과정 |
1435년 부르고뉴가 영국 편에서 빠져나왔다
전쟁 후반부의 결정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부르고뉴의 동맹 변화였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에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내부의 강력한 부르고뉴 세력과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35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샤를 7세가 화해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프랑스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 가운데 하나를 잃은 셈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436년에는 파리도 다시 샤를 7세 측으로 넘어갔습니다.
전쟁의 힘의 균형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전쟁을 끝낸 것은 프랑스의 변화였다
백년전쟁의 마지막을 이해할 때 잔 다르크만큼 중요한 인물이 샤를 7세입니다.
샤를 7세 시대에 프랑스 왕권은 오랜 혼란을 수습하면서 군사와 재정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국가기록포털 FranceArchives는 샤를 7세가 1445년부터 상비군 체제를 만들고 상당한 재정적 노력을 통해 이를 뒷받침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전의 중세 군대는 왕이 필요할 때 귀족들에게 병력을 요청하는 봉건적인 방식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전쟁을 지속하려면 이러한 방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점차 안정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고 전쟁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포병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프랑스에는 성과 요새 도시가 많았습니다. 적군을 야전에서 한 번 격파하는 것만으로는 영토를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벽을 무너뜨리고 요새를 점령할 수 있는 포병의 발전은 프랑스의 영토 회복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1450년과 1453년, 영국의 지배지가 무너졌다
프랑스는 1449년부터 노르망디를 본격적으로 공격했습니다.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했고 같은 해 영국은 노르망디에서 대부분의 거점을 잃었습니다.
이어 프랑스는 영국이 오랫동안 지배해 온 남서부 기옌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는 1453년 카스티용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포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카스티용 전투 이후 영국은 프랑스 본토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에서 장기간 유지했던 주요 거점 가운데 칼레만 남게 됐습니다.
1453년을 백년전쟁의 종결 시점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백년전쟁이 116년이나 이어진 이유
| 원인 | 전쟁이 길어진 이유 |
|---|---|
| 프랑스 내 영토 | 영국 왕이 프랑스 안에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어 프랑스 왕권과 지속적으로 충돌했습니다. |
| 왕위 계승권 |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면서 단순한 영토 분쟁이 왕위 경쟁으로 확대됐습니다. |
| 완전한 정복의 어려움 |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넓은 프랑스의 수많은 도시와 요새를 계속 지배하기 어려웠습니다. |
| 휴전과 재전 | 조약이 체결되어도 영토와 왕위 문제 자체가 해결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전쟁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
| 프랑스 내부 분열 | 부르고뉴 등 강력한 귀족 세력이 어느 편에 서는지에 따라 전쟁의 힘의 균형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
| 군사·재정 체제 변화 | 전쟁 후반 프랑스가 안정적인 군대와 재정을 갖추면서 영국의 점령지를 체계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
전쟁 방식도 116년 동안 달라졌다
백년전쟁은 단순히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를 바꾼 전쟁만은 아니었습니다.
1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럽의 전쟁 방식 자체가 변했습니다.
전쟁 초반 영국군의 장궁병은 크레시와 푸아티에 같은 전투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여줬습니다. 중무장한 기사들의 돌격만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군대를 모집하는 방식도 변했습니다.
영국에서는 해외 원정을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왕과 지휘관이 계약을 맺고 급료를 받는 병력을 모집하는 방식이 확대됐습니다.
전쟁 후반에는 화약 무기와 대포의 중요성도 커졌습니다. 특히 성과 요새를 공격하는 공성전에서 포병은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즉 백년전쟁은 기사와 봉건 영주의 군대가 중심이던 중세적 전쟁에서 왕실의 재정과 조직적인 군대, 화약 무기가 중요해지는 전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줬습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도 바꿨다
프랑스에서는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왕권이 군대와 세금을 보다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지역 귀족들이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싸우는 것만으로는 장기간의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잃으면서 수백 년 동안 이어졌던 영국 왕실의 대륙 지배 구상이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영국에서는 왕위와 권력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격화됐고 결국 15세기 후반 장미전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이 나타났습니다.
백년전쟁은 단순한 국경 전쟁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모두의 정치 질서를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백년전쟁은 왜 그렇게 오래 이어졌을까
백년전쟁이 116년이나 이어진 이유를 하나의 사건이나 한 명의 왕에게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영국 왕은 프랑스 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왕권이 이를 통제하려 하면서 갈등이 반복됐습니다.
여기에 1328년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고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면서 전쟁의 성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영국이 크레시와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 큰 승리를 거두더라도 프랑스 전체를 장기간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 역시 한 번에 영국군을 몰아낼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휴전과 조약이 반복됐지만 갈등의 뿌리는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것은 한 번의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부르고뉴가 영국과 결별하고 샤를 7세의 정통성이 강화됐으며, 프랑스 왕권이 안정적인 군대와 재정 체제를 만들면서 힘의 균형이 바뀌었습니다.
백년전쟁은 어느 한쪽이 갑자기 강해져 끝난 전쟁이 아니라, 100년 넘게 이어진 정치·군사·사회 구조의 변화 끝에 더 이상 영국이 프랑스에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지면서 끝난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년전쟁의 역사를 보면 중요한 것은 '누가 어느 전투에서 이겼는가'만이 아닙니다.
한 번의 승리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을 때 전쟁은 어떻게 다시 시작되는지, 그리고 결국 국가의 조직력과 재정, 동맹 구조의 변화가 전쟁의 결과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백년전쟁은 정확히 몇 년 동안 계속됐나요?
일반적으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16년에 걸친 분쟁을 백년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116년 내내 전투가 이어진 것은 아니며 전쟁과 휴전이 여러 차례 반복됐습니다.
백년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하나의 원인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영국 왕이 보유한 프랑스 내 영토를 둘러싼 갈등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더해지면서 장기전으로 확대됐습니다.
영국은 왜 큰 전투에서 계속 이기고도 결국 패했나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넓은 프랑스 영토를 지속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프랑스는 패배 후에도 병력을 다시 모을 수 있었고, 전쟁 후반 왕권과 군사·재정 체제가 강화되면서 점령지를 되찾았습니다.
잔 다르크가 백년전쟁을 끝냈나요?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인물이지만 전쟁을 직접 끝낸 것은 아닙니다. 잔 다르크는 1431년 처형됐고 백년전쟁은 1453년까지 20년 이상 더 이어졌습니다.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1453년 카스티용 전투를 백년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로 봅니다. 이후 영국은 프랑스 본토에서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습니다.
참고 출처
- Royal Armouries, The Hundred Years' War 1337-1453
- The National Archives, Gascony invaded, 1224
- The National Archives, Richard II
- FranceArchives, Naissance de Charles VII
자료 확인일: 2026년 8월 30일